Design Work Log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자던 지방대생, 해외에서 17년 차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아부다비사는 부산여자 Cindy 2026. 6. 1. 21:43

나는 대전/논산에 있는 지방대를 나왔다. 내 전공은 인테리어 디자인 / 건축 디자인.
수능을 쳤을 때는 다른 명문대학의 디자인과를 가고 싶었으나 실패.
그러고 나서 반수를 준비하고 다시 수능을 치려 했으나, 이미 흘러간 반 학기와 수능을 다시 준비하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을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대였어도 뱀의 머리가 되자는 생각으로 나름대로 술도 먹고 공부도, 과제도 열심히 하면서 살았다.
과탑도 해보고, 선배들이랑 술 배틀도 많이 뛰고 ㅋㅋ

3학년이 되기 전에 이중전공을 할 수 있다고 들어서 뭣도 모르고 신청했다.
인테리어 디자인이 이미 빡쌨음에도 불구하고 건축 디자인을 같이 들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화요일에는 인테리어 디자인 설계 수업, 그리고 건축 디자인은 목요일 설계 수업.

그래서 졸업전시회도 두 번이나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모르겠다. 과제 때문에 밤새워 가며, 술 먹어가며.
그러다 4학년 2학기가 되기 전에 학교 내에서 무슨 해외 취업 프로그램이 있다고 광고하는 걸 보았다. “싱가포르 해외 취업 프로그램”

그때도 뭣도 모르고 신청했다.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게 힘들지 어떨지도 모르고 사는 것도 괜찮은지 몰랐지만, 뭐가 됐든 간에 한국에서 취업해서 힘들게 사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뭔가 한국에서만 박혀 사는 게 아깝게 느껴졌다.
젊어서 그런지 무모했던 것 같다. 그때 당시 대전시청에서 해외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지원금도 준다고 해서 개꿀!이었었다. 아주 한참 뒤에나 받았지만.

그 프로그램에 신청한 우리 대학교 학생들에 일반인들 몇 명을 더해서 총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싱가포르로 갔다.
우리 대학교에서 갔던 사람들은 가자마자 4학년 2학기를 수료해야 해서, 싱가포르에서 다리 건너에 있는 조호바루에 있는 한 대학교로 갔다. (그 대학교랑 우리 대학교랑 자매교환 파트너십을 맺어서 학생들을 서로 보내고 받고 했던 듯하다.)

학교 캠퍼스가 완전 커서 학교 내에서도 버스 타고 다녔다. 한적하고 나무도 많고 (원숭이도 많고) 좋았는데, 학교 내에 있던 식당의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잘 못 먹었다. 거의 매일 신라면 봉지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살이 계속 빠졌던 기억이 난다. ㅠㅠ 아, 가끔씩 돈있으면 이란애들이 하는 캔틴에가서 밥이랑 고기 얹어진 도시락 하나사서 친구랑 같이 나눠먹기도 했다. 

그러다 4개월이 지나고 졸업식도 하고 졸업장도 받고, 그렇게 대학교 생활이 끝났다.

그리고서 싱가포르로 넘어온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취업의 문에 덤벼들었다.

오전에는 싱가포르 시티홀 근처에 있는 어학원으로 영어 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내 영어 수준은 중간반이었나... 중간 밑이었나ㅋ
그리고 그때 우리랑 대학교 중간에서 일해주는 에이전시 회사에서 학생 비자(6개월이었던가? 그게 싱가포르에서 직장찾고 자리잡을 기한이라고 생각했다.)도 받아주고 (비자를 그쪽에서 직접 내준 건 아니고 우리가 다녔던 학원에서 내준 건데, 그 회사에서 중간에서 서류 내고 하는 역할을 해줬다), 비즈니스 영어라든지 싱가포르 생활이라든지 알려주는 수업도 열어주었다. 

내 영어 수준은 솔직히 밑바닥이었다. 영어 공부를 학교에서나 대충 문법 위주로 배우고, 대화는 거의 기본도 못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예전에 말레이시아에 있었을 때 (그때 슈퍼주니어가 유행이었어서 말레이 애들이 우리 보면 와서 한국인이냐며 가끔 말 걸고 그랬었음) 어떤 여자애들 두 명이 나한테 와서 "Hi, are you Korean?"이라고 물었는데, "Okay"라고 대답한 멍청한 나. 영어도 못하고 외국인들한테는 너무 낯가렸던 그 쪽팔린 기억이 머릿속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ㅋㅋ

아무튼 그래서 나름대로 영어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다는 의지로 말레이시아에 있었을 때부터 'Grammar in Use' 책이랑 인강도 보면서 다시 문법 공부도 하고, 싱가포르로 넘어와서는 한국에 관심 있는 현지 싱가포리안들과 랭귀지 익스체인지도 하고 (관련 사이트가 있음), 일하기 전/후엔 스카이프(Skype) 영어 1:1 전화 수업을 내 돈 내가며 듣고 책 읽고 했다. 써놓고 보니까 나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 많이 했네? ㅎㅎ

나는 우리 집에서 해외 생활을 뒷받침해 줄 여유가 되지 않아서 저녁에는 항상 한국 식당으로 시급 7~8불을 받으면서 일하러 다녔다. 식당에서 고기 굽고 일하다 쩔어서 집에 오면 바로 샤워하러 갔던 기억이 난다.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로 넘어오기 직전에는 매 주말마다 와서 집 찾기 바빴었는데, 싱가포르에서 제일 비싼 오차드 지역의 한 콘도에 잘나가는 한국 언니들이 사는 집에 메이드룸 같은 작은 남는 방을 힘들게 구했다. 2011년 당시에 한 달에 550불(다 포함).
짐이 별로 없었어서 작은 방은 괜찮았지만 그때는 알바해서 그 월세 내기도 힘들었었다. ㅎㅎ 작은 방이었지만 그 위치에 그 집에 한국인 언니들이랑 살게 된것도 운이 좋았던듯. 

그러다 교민 사이트인 '한국촌'에 올라온 한국의 ㅎ건설사 현장에서 사람 구한다는 글을 보고 지원했는데, 운 좋게도 지원하자마자 일주일도 안 돼서 면접 보고 바로 취업이 되었다.
현장에 면접용 옷과 구두를 신고 가니 현장에서 일하는 애들이 다 신기하게 쳐다봤었다 ㅋㅋ

건설사 현장에서는 Project Assistant / Document Controller 일을 했었는데, 쉽게 말하면 제일 밑바닥에서 현장 도면 치는 애들 도와주거나, 몇 번이나 수정돼서 승인받은 도면들을 하청업자들한테 배부하고 새로운 도면 있으면 또 받는 일이었다. 현장이라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했다. 그래도 한식 점심이 잘 나와서 좋았다. ㅎㅎ

그 현장이 싱가포르 동쪽 끝에 있어서 지하철로 출퇴근이 왔다 갔다 총 두 시간이나 걸렸었다. 사는 집을 현장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기지 않았던 건 집에 같이 사는 언니들도 좋았고, 부자동네에서 부자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부자가 될 거다'라는 다짐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언젠가 글을 본 적이 있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인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으라고. ㅎㅎ 그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간 크게 되리라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현장에 한국 소장님, 부장님, 차장님, 대리님들 다 너무 좋았지만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뒀다. 미국 건축 디자인 컨설턴트 회사에 취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그때도 그 회사에서 일하시던 한국계 미국인 이사님이 한국촌에 '한국 프로젝트에서 일할 한국 사람을 구한다'고 글을 올리셨는데, 그 이사님이랑 인터뷰를 하고, 이사님의 보스인 싱가포르 현지인 다이렉터 아줌마랑 또 인터뷰를 해서 총 두 번을 보고 나서 취업이 되었다. 거진 16년 전 일이라 면접에서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냥 영어를 너무 못했어서 자신감도 없고 떨었던 기억만 난다. ㅎㅎ
이 회사에 취업이 된 건 내 인생에 대운이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다. 내 직업운이 최고로 폭발한 듯했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큰 행복감을 느꼈던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때 당시 내 보잘것없는 포트폴리오랑 이력서는 같은 집에 다른 방에 살던 미국계 한국인 언니가 봐줬다. 영어도 고쳐주고 면접 볼 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줬었다. 미국인이라 그런가 무조건 "자신 있게!"를 외치며 파이팅을 해주었다ㅋㅋ 또 다른 방에 살던 한국인 언니는 인사과에서 일해서 면접에서의 주의점도 알려주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 찾아온 인복들이 내가 이 직업을 갖게 도와줬던 것 같다. ㅎㅎ

그리고 영어도 못하는 나에게 기회를 준 다이렉터 아줌마한테 항상 감사하다. (아직도 생일에 연락하고 설날 되면 왓츠앱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ㅎㅎ) 도대체 나의 어떤 면을 보고 뽑았을까?
그때 당시에는 핸드폰 배경화면마저도 회사 로고를 넣고 다녔다. 너무너무 좋았어서. ㅋㅋ

회사에서 매일 볼 수 있었던 뷰

15년전쯤에 찍은 사진들이라 화질은 별로지만 그때 그 회사에서 이 뷰를 보고있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미국 회사에서 일하는 건 생각했던 대로 어메이징했다. 회사도 시내에 있었지만 빌딩도 너무 멋진 곳이었다. 주변은 맛집 천국 ㅎㅎ
물론 마감이 있을 땐 야근도 했지만 다들 영차영차 열심히 해서 끝내버리자는 분위기라 일할 맛이 났던 것 같다.

야근 수당은 없었지만 오후 8시까지 일하면 10불까지 저녁 값을 청구할 수 있었고, 밤 10시 넘어서까지 일하면 택시비를 청구할 수 있었다. 나야 그땐 젊고 따로 할 것도 없으니 일하고 밥 먹고 집에 오는 게 좋았다. 그리고 야근은 나만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ㅎㅎ
가끔 애들이랑 야근하면서 회사에서 맥주도 마셨다. 고되지만 재밌었다.

야근하고나서 MRT(지하철) 타러 가는길에. 이런 뷰를 보면서 퇴근하면 피곤해도 행복했다.

 

그리고 큰 마감이 끝나면 보스들이 애들 다 데리고 나가서 점심도 사주거나, 금요일 저녁에 나가서 간단하게 술 먹으면서 외식도 했다. 어딜 가나 보스의 역할이 너무 중요하다. 지금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가서 일하고 싶을 만큼 그때가 많이 그립다.
이때도 내 영어는 개발새발이었지만 애들이 착해서 다 이해해 줬던 것 같다. ㅎㅎ

 

이 미국 회사 싱가포르 지사에서 대략 5년을 일했는데, 한 3년이 넘어가던 때에 팀을 옮겼다.

내가 처음에 조인했던 팀은 마스터플랜(도시계획) 팀이었는데, 내가 하던 일은 싱가포르 스태디움 현장에서 도면 치기, 그리고 팀 애들이 일하는 마스터플랜에 들어갈 건축 컨셉 디자인과 면적 뽑기, 오프셋은 도로에서부터 얼마인지 계산하기 등등이었다.
대략적인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는데, 실제로 그대로 지어질지는 모르는 그림과 면적을 뽑는 일이었다.
그래도 미국계 한국인 이사님이 하시던 일은 관광 쪽 프로젝트들이 많아서 동남아에 있는 호텔 등 재미있는 마스터플랜 프로젝트들을 많이 했었다.
아 참, 내가 처음에 뽑혔을 때 일하려고 했던, 한국인이 필요했던 한국 프로젝트는 나랑 다른 한국 분이 조인하고 나서 안타깝게도 취소되었다; ㅎㅎ

3년이 지나 옮겼었던 다른 팀은 Healthcare Design, 병원 프로젝트에 집중했었던, 미국 지사에서 딴 '싱가포르 셍캉 국립병원'을 디자인하는 프로젝트였다. 일단은 내가 원하던 인테리어 일이었기 때문에 일은 너무 좋았다. - 주말에 자진해서 회사와서 일하고 그랬었음... 에너지 무엇; 젊었다.
그 셍캉 병원이 지어지면 옮겨가서 일할 의사나 간호사들을 직접 만나서 각 병동의 로비, 리셉션, 환자 가족들이 기다리는 곳, 그리고 환자 병실들은 어떤 배치로 어떤 가구들을 놓고 어떤 디자인 재료들을 쓸 것인가 등을 의논하고 디자인했다.

팀은 별로였지만 일은 진짜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일단은 병원이 보기 좋은 디자인보다는 먼저 실용적이어야 하고, 재료라든지 고정장치라든지 환자들을 위한 공간을 디자인하는 거라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인테리어 디자인 단계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원래 프로젝트를 땄었던 미국 미네소타 지사에서 왔었던 인테리어 다이렉터 아저씨랑 한 달 정도 일했었는데, 의사들, 간호사들, 스태프들한테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과정이었어서 이때까지 승인받지 못했던 디자인들을 다 마감하느라 빡쌨다.
챌린지였던 부분은 의사들, 간호사들 다 도면을 이해하지 못해서, 레빗(Revit) 모델에서 3D를 뽑아서 포토샵을 하거나 아니면 바로 스케치업으로 돌려서 공간들을 설명해 줘야 했다. 그래야 우리가 최종 승인을 받으니까. ㅎㅎ

이 미국인 아저씨랑 몇 주간 일하면서 내가 영어는 못했어도 일은 잘했었나 보다.
이 셍캉 병원 프로젝트가 마감되면서 다른 새 병원 프로젝트를 따지 못해 팀이 다 해체되고 있을 무렵에 이 아저씨가 아부다비에 있는 건축팀 다이렉터한테 나를 추천하는 이메일을 써보내주었다.

미네소타 지사가 아부다비나 중동에 있는 지사들과 병원 프로젝트를 많이 같이 하고 있었는데, 그쪽이 아무래도 계속 일이 많을 것 같으니 나더러 중동으로 가서 일하라는 미국인 아저씨의 추천이었다.
처음엔 중동을 가라고? 내가? 가서 살 수 있을까? 싶었지만, 싱가포르에 점점 디자인 쪽 일이 줄어들다 보니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다른 회사에 지원해도 영주권자나 싱가포리안 현지인들만 뽑는다거나, 월급이 맞지 않았다.

그렇게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아부다비 지사에 있는 건축팀 대장 아저씨한테 전화가 왔다.
싱가포르 지사에서는 얼마나 일했냐, 어떤 프로젝트 일해봤냐, 레빗이나 어도비 포토샵 이런 디자인 툴 다룰 줄 아느냐 등등 진짜 딱 필요한 질문들만 하더니, 곧 인사팀에서 연락 올 거라며 통화한 지 몇 분 만에 끊았다ㅎㅎ
미국에 있던 다이렉터 아저씨가 나에 대해서 이메일을 얼마나 잘 써줬으면 전화 면접이 이렇게나 간단하게 끝날까 싶었다. 아니면 그때 그 대장 아저씨가 너무 바빴나? 아무튼 이때도 내 대운이 작동했던 것 같다.

그러다 몇 주 뒤에 인사과에서 연락이 와서 서류들 이것저것 이메일로 주고받고 비자도 받고, 몇 주를 그렇게 지내다 제일 더울 7월 한여름에 아부다비로 옮겨왔다.
그리고 그 아부다비 지사에서 5년 더 일하게 되었다. 한 회사에서 총 10년 정도 일한 셈이다 ㅋㅋ 내가 생각해도 장하다...

처음 중동에 와서 적응하느라, 싱글리쉬 악센트도 고치랴, 영어도 더 잘해야 했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와서 터를 잡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일하는 스타일이 다르다. 더 빡쌔고 치열하다. 마감도 더 자주 있고,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마감이 있었던 것 같다.
살아남는 법은? 그냥 계속 무조건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 5년 동안 제일 빡쌨던 건 코로나 시국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해고되거나 떠난 뒤 남겨진 나는 그들이 남기고 간 일들을 다 도맡아서 했었다. 한 주에 마감이 3개 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 모든 여정이 그때 내가 젊어서 다 가능했던 걸까?
무작정 그냥 별생각 없이 실천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생각이 너무 많거나 아는 게 너무 많으면 겁도 많아지는 법이다.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못 할 건 뭐임? ㅋ 일단 해보지뭐 이런 생각이었던것 같다.

싱가포르에서 처음 제대로 된 직장을 갖는 게 힘들었을 뿐,
현재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즐기면서 일하다 보면 다른 길이 열리는 것 같다.

솔직히 개인적인 생각은 한국인들은 일머리가 뛰어나고 부지런해서 어딜 가나 보통 이상은 하는 것 같다.
많은 젊은 한국 사람들이 한국에만 있지 말고, 해외 나와서 일했으면 좋겠다. 인생 한 번 사는 거 다른 경험도 하고 얼마나 좋아?

지방대 출신에, 영어도 못했던 내가 아직까지 해외에서 일하고 사는걸 보고 다른 한국사람들이 영감을 조금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